
카타르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스무 살 준호는 매달 월급 200만 원 중 90만 원을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보냅니다. 예전엔 은행을 통해 송금했는데 수수료로 6~7만 원이 빠지고, 주말이 끼면 사흘 넘게 걸렸습니다. 어느 날 동료의 권유로 달러 스테이블코인 지갑을 사용해 보냈더니 수수료는 몇 천 원 수준이었고 10분도 안 돼 도착했습니다. 부모님은 바로 생활비로 쓸 수 있었죠. 준호는 그때 처음으로 "돈의 방식이 바뀌고 있구나"라는 걸 실감했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단순한 기술 혁신으로만 봤습니다. 하지만 자료를 들여다보고 실제 사례를 접하면서, 이건 송금 수수료 몇 푼 아끼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돈의 규칙을 누가 설계하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권력 게임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이 바꾸는 송금의 풍경
지금 우리가 쓰는 국제 송금 시스템은 1970년대에 출범한 스위프트 메시징 표준 위에 다단계 중계 은행 구조가 겹쳐진 방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낡고 복잡한 수도관 네트워크 같은 겁니다. A 은행에서 B 은행으로 돈을 보내려면 중간에 수많은 밸브와 펌프, 즉 중계 은행들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마다 시간이 걸리고 수수료가 붙습니다.
세계 평균 국제송금 수수료는 약 6% 안팎이고, 경로에 따라 10%에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100만 원을 보내면 수만 원이 수수료로 빠져나가는 셈이죠. 더 큰 문제는 시간입니다. 영업일 기준으로 며칠씩 걸릴 때도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 영상 통화를 실시간으로 하는 시대에, 돈은 여전히 느리게 이동합니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을 쓰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USDT나 USDC 같은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상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중계 은행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스마트폰 버튼 몇 번만 누르면 몇 분 안에 국경을 넘어 송금이 완료됩니다. 수수료도 기존 시스템과 비교하면 훨씬 낮습니다.
실제로 자국 화폐 가치가 폭락하는 아르헨티나, 터키,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정부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은행 대신 암호화폐 지갑을 열고 자국 화폐가 아닌 USDT를 삽니다. 2024년 말 기준으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총 시가총액은 1,600억 달러 안팎까지 커졌습니다. 우리 돈으로 약 230조 원입니다. 이건 웬만한 국가의 1년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입니다.
미국과 중국, 서로 다른 전략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전략은 완전히 다릅니다. 미국은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형태의 공식 디지털 달러를 직접 발행하지 않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대신 테더나 서클 같은 민간 기업들이 만든 디지털 달러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도록 사실상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규제받지 않는 민간 코인을 골칫덩어리로 여겼지만, 어느 순간 정책 입안자들이 깨달은 겁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이 민간 기업들이 알아서 전 세계에 달러를 퍼트리고 있다는 사실을요. 2025년에는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안인 지니어스 액트 논의가 입법 절차에서 크게 진전되며 규제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이 법안의 핵심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에게 명확한 규제와 감독의 틀을 제공하되, 민간의 역동적인 혁신은 그대로 살리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교묘한 부분이 나옵니다. 법안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고객으로부터 받은 준비금을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은 자산으로 보유하도록 요구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은 자산은 바로 미국 국채입니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 어디에선가 누군가 100달러어치 USDC를 사면, 그 돈이 서클의 계좌로 들어가고, 서클은 그 돈으로 미국 국채를 삽니다. 아르헨티나 청년은 그저 편리한 디지털 달러를 샀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간접적으로 미국 정부의 국채 자금 조달 구조에 편입되는 겁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2025년 기준 37조 달러대로 불어났습니다. 우리 돈으로 약 5경 원입니다. 이자 비용만 회계 연도 기준으로 1조 달러 안팎까지 커졌습니다. 미국은 이제 특정 국가에 대한 국채 수요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새로운 선택지를 확보한 겁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전 세계 수많은 개인들로부터 24시간 마르지 않는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구축한 거죠.
반면 중국의 전략은 정반대입니다. 중국은 민간 기업이 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대신 중국의 중앙은행이 직접 디지털 위안화를 개발했습니다. 이것은 스테이블코인과는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USDT가 은행에 예치된 달러를 대표하는 디지털 증표라면, 디지털 위안화는 그 자체가 중앙은행이 발행한 법정 화폐입니다.
디지털 위안화 시스템에서는 모든 거래 기록이 중앙 서버에 남습니다. 정부는 당신이 오늘 아침 빵을 사는데 얼마를 썼는지, 어제 친구에게 얼마를 보냈는지 이론적으로 실시간 파악이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돈에 꼬리표를 붙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난 지원금으로 10만 원어치 디지털 위안화를 지급하면서 "이 돈은 30일 이내에 전통 시장에서만 사용 가능"이라는 조건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더 큰 야심은 달러 패권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에 참여하는 아프리카나 동남아 국가들에게 디지털 위안화로 원유 대금을 결제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기존 송금보다 수수료도 없고 실시간 처리되며, 무엇보다 미국의 감시와 제재를 피할 수 있다는 게 중국 측 논리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방식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자유롭지만 결국 미국 금융 시스템에 종속되고, 중국은 효율적이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거의 포기해야 한다고요. 둘 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AI 경제 시대, 프로그래밍 가능한 돈
앞으로 몇 년 안에 우리의 경제 활동 상당 부분이 AI에 의해 자동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당신의 스마트 냉장고가 우유가 떨어진 걸 확인하고 가장 저렴한 마켓에서 자동으로 주문하고 결제합니다. 당신의 AI 비서는 당신의 휴가 계획에 맞춰 가장 싼 항공권과 숙소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예약까지 마칩니다.
문제는 이 똑똑한 AI가 지금의 금융 시스템 안에 있는 돈을 직접 이해하고 자유롭게 다루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돈은 은행 전산망과 규제, 인증 절차에 강하게 묶여 있어 AI가 직접 통제하거나 조건부로 실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AI에게 은행 앱을 열고 공인인증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이체 버튼을 누르라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AI 경제 시대에 필요한 돈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돈입니다. 마치 컴퓨터 코드를 짜듯 "만약 A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B에게 C만큼의 돈을 즉시 전송하라"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돈, 즉 프로그래밍 가능한 돈입니다.
프로그래밍 가능한 돈이 있으면 이런 일이 가능해집니다. 당신의 자율주행차가 고속도로를 달릴 때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하이패스 단말기를 거칠 필요 없이 이동 거리나 시간에 비례해 초소액 단위로 요금이 정산됩니다. 전기차 충전소에 도착하면 충전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충전된 전기량만큼만 정확하게 결제합니다. 당신이 구독하는 온라인 콘텐츠는 더 이상 월 9,500원 같은 정액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AI 에이전트가 당신이 기사 한 줄을 읽을 때마다, 영상 1분을 볼 때마다 작가와 제작자에게 직접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듯 지급합니다.
비자 네트워크는 초당 약 6만 건 수준의 거래처리 용량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AI 에이전트 경제가 본격화되면 현재 금융 인프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초대규모 마이크로 트랜잭션 처리가 요구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존의 은행 전산망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죠.
이제 왜 구글과 메타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그토록 스테이블코인에 집착했는지, 왜 각국 중앙은행들이 서둘러 CBDC 개발에 뛰어들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다가올 AI 경제 시대에 돈을 지배하는 자가 미래 세계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겁니다.
저는 이 변화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권력의 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송금이 빨라지고 수수료가 줄어드는 편리함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누가 돈의 흐름을 설계하고 통제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미국식 스테이블코인은 자유롭다고 하지만 결국 미국 국채와 금융 시스템에 종속됩니다. 중국식 CBDC는 효율적이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거의 포기해야 합니다. 비트코인은 탈중앙을 말하지만 가격 변동성과 규제 리스크가 큽니다.
결국 '프로그래밍 가능한 돈'은 편리함과 동시에 감시와 통제의 가능성도 함께 키웁니다. 기술을 무조건 낙관하기보다, 개인의 금융 주권과 데이터 권리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먼저라고 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미국이나 중국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따르는 사용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K콘텐츠와 K게임이라는 우리만의 강점을 살려 새로운 판을 여는 설계자가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의 시간은 이미 시작됐고, 그 결과에 따라 앞으로 수십 년간 우리 자녀 세대의 부와 대한민국의 운명이 결정될 가능성이 큽니다.